1.인왕산 소개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고도 338.2 m의 산으로, 산 중에서도 바위산에 속한다. 한양도성의 산으로는 북악산보다 3.8 m 낮은 2위이며 평균 경사도는 5.12%이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서 ‘우백호’를 담당하는 산이라고 한다. 이는 경복궁 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인왕산이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로 매우 유명한 산이었다.[3] 따지고 보면 지리산이나 금강산이 훨씬 더 웅장해서 호랑이도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야산 격인 이 인왕산의 호랑이가 더 유명하다.[4] 정조 대왕 때만 해도 호랑이가 서울에 흔했고, 이들 호랑이가 민가는 물론 궁궐까지 난장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인 듯. 참고로,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 마리를 마지막으로 도성 내 호랑이는 모두 사라졌다.
인왕산 정상에 자리한 ‘치마바위’의 이름 유래와 관련한 조선 왕조 일화가 유명한데, 중종의 왕비였던 폐비 신씨는 날마다 중종이 있는 경회루 쪽을 향해 매일 시비를 시켜서 놓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폐비 신씨의 절개를 기려 치마바위라는 명칭을 유래하였다고 한다. 인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활터인 '황학정'이 있는데, 1898년 활쏘기를 장려하는 고종황제의 칙령에 따라 세워진 국궁장이다. 고종황제가 직접 활을 쏘기도 하여 황제를 초대 사두로 친다. 본래 경희궁에 있었는데 1922년에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며 옮겼다. 절벽 중 한 곳에 정체 불명의 파인 흔적이 잔뜩 있는데, 이는 1939년 9월 16일에 새겨진 일제의 선동 문구 흔적이다. 대일본 청년단 대회 기념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선동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는데 독립 후 누군가에 의해 훼철되어 현재는 글자는 알아볼 수 없고 파낸 흔적만 남아있다. 인왕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1393년에 무학대사가 세운 사찰이다. 조계종, 태고종 등 서로 다른 5개 종단의 작은 암자 14개가 모여 인왕사라는 절을 형성하였다. 그래서인지 사찰이 다소 특이한데, 산자락에 군락형으로 자리잡혀 있다. 실제로 가 보면 하나의 작은 마을 같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부속 건물도 다른 사찰과 달리 '극락전', '보광전', '대웅전', '관음전', '선암정사'로 다양하다(보광전은 현재 전소 상태). 이렇게 특이한 형태로 이어져 오다가 1988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2.역사적 배경
인왕사는 봉은사에서 갈라져 나온 말사로 규정하고 있다. 절의 체계도 복잡한데 지주가 4명이며 해마다 번갈아가면서 맡고 있다. 언급했듯이 1910년대 이래로 여러 암자가 통합되지 않고, 제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해온 흔적으로 보고 있다. 입구 현판은 仁王寺[6]로 되어 있으나 행정상 ‘산’만 王이지 사찰은 여전히 仁旺寺가 표준이다.
명목상 절의 중심으로 보고 있는 ‘인왕사 본원정사(前 선암정사)’는 국사당 바로 아래에 있다. 평소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사당 쪽 산 샛길로 200m 정도 올라가다 보면, 부처 그림이 새겨진 바위와 약수터가 나오는데, 지도 안내판상으로는 그곳이 ‘실질적 인왕사의 기원’임을 시사하고 있다. 인왕사 일대에 선 바위가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는 바위. 선(禪)을 행하는 바위라고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한자 표기는 선암(禪岩)이며 ‘선 바위’처럼 띄어 쓰는 게 표준인 것으로 보인다.# 국사당 쪽 산자락 어귀에서 샛길로 올라가다 보면 선 바위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인왕사 선 바위는 조선 초기 불교와 유교 간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중요한 유물로,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의 갈등에 중심에 놓이기도 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서 ‘우백호’를 담당하는 산이라고 한다. 이는 경복궁 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인왕산이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로 매우 유명한 산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리산이나 금강산이 훨씬 더 웅장해서 호랑이도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야산 격인 이 인왕산의 호랑이가 더 유명하다.정조 대왕 때만 해도 호랑이가 서울에 흔했고, 이들 호랑이가 민가는 물론 궁궐까지 난장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인 듯. 참고로,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 마리를 마지막으로 도성 내 호랑이는 모두 사라졌다. 인왕산 정상에 자리한 ‘치마바위’의 이름 유래와 관련한 조선 왕조 일화가 유명한데, 중종의 왕비였던 폐비 신씨는 날마다 중종이 있는 경회루 쪽을 향해 매일 시비를 시켜서 놓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폐비 신씨의 절개를 기려 치마바위라는 명칭을 유래하였다고 한다. 인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활터인 '황학정'이 있는데, 1898년 활쏘기를 장려하는 고종황제의 칙령에 따라 세워진 국궁장이다. 고종황제가 직접 활을 쏘기도 하여 황제를 초대 사두로 친다. 본래 경희궁에 있었는데 1922년에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며 옮겼다. 절벽 중 한 곳에 정체 불명의 파인 흔적이 잔뜩 있는데, 이는 1939년 9월 16일에 새겨진 일제의 선동 문구 흔적이다. 대일본 청년단 대회 기념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선동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는데 독립 후 누군가에 의해 훼철되어 현재는 글자는 알아볼 수 없고 파낸 흔적만 남아있다.
주말 등산 코스로도 유명한 곳이다. 다만, 범바위까지는 순조로울 순 있어도 치마바위(정상) 쪽부터 기암괴석이나 암벽 지형이 등장하므로 어린이나 노약자가 등산하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 실제로도 산악 사고도 빈번한 곳이므로 매우 주의가 필요하다. 인왕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1393년에 무학대사가 세운 사찰이다. 조계종, 태고종 등 서로 다른 5개 종단의 작은 암자 14개가 모여 인왕사라는 절을 형성하였다. 그래서인지 사찰이 다소 특이한데, 산자락에 군락형으로 자리잡혀 있다. 실제로 가 보면 하나의 작은 마을 같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부속 건물도 다른 사찰과 달리 '극락전', '보광전', '대웅전', '관음전', '선암정사'로 다양하다(보광전은 현재 전소 상태). 이렇게 특이한 형태로 이어져 오다가 1988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3. 총평
인왕산은 서울 도심에 자리하면서도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풍부한 산으로, 한양도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자 서울을 대표하는 바위산입니다. 낮은 고도에도 불구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암벽 지형이 많아 산행에 도전감을 더해줍니다.
조선 시대의 유구한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장소로, 특히 ‘우백호’라는 상징성과 폐비 신씨와 관련된 치마바위 등은 인왕산이 단순한 산을 넘어 문화와 전통의 공간임을 보여줍니다.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가 많아 위험한 산으로도 알려졌으나, 현재는 서울 시민들에게 힐링과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도심 속 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황학정과 인왕사와 같은 유적 또한 인왕산의 독특한 매력을 더해줍니다.또한, 일제강점기의 흔적과 해방 후의 변화까지 산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상흔은 인왕산이 단순한 자연 경관 이상의 존재임을 잘 보여줍니다.종합적으로 인왕산은 자연과 역사, 문화를 한데 아우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울의 보석 같은 공간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