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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소개, 역사적 배경, 총평

by sinwhy 2024. 12. 18.

1.금강산 소개

 

북한 강원도 금강군·고성군·통천군과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현내면·수동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향로봉 일대 포함시 인제군도 포함한다. 한 때는 영어로 의역하여 '다이아몬드 마운틴(Diamond Mountain)'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금강산은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한민족을 대표하는 명산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금강산을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관광지 중의 하나로 높게 평가한다.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8.15 광복 이후 현재까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문학과 예술의 배경으로도 인기가 많았던 관광지였다. 그래서, 남북분단 이전의 옛날 사람들은 동해안으로 놀러간다고 하면 으레 경원선을 타고 원산이나 금강산으로 놀러간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명성이 높았다.하지만,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금강산을 비롯한 주요 지역은 북한령에 편입되면서 찾아가기가 매우 힘들어졌고 남한에 있던 금강산으로도 간주되던 지역은 상당수가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금강산과 별개로 인식되었다.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1998년 말 - 2008년까지는 남한 사람들도 북한을 방문하여 일부 구역을 관광할 수 있었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중단되었다. 물론 지금도 방문증명서를 받으면 누구든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높은 비용과 신변 안전이 문제이고 추후 미국 무비자 입국을 위한 ESTA 발급 자격도 영구적으로 박탈된다.

 

 

 

높이 1,638m에 태백산맥 북부에 있다. 금강산 하면 떠올리는 것은 역시 금강산과 그 일대 산을 모조리 묶어 관용적 표현으로 굳은 '12천 봉우리'그 중에서 최고봉인 비로봉이 가장 눈에 띈다. 금강산을 주제로 한 동요와 가곡이 있을 정도다.

흔히 안쪽 내금강과 바깥쪽 외금강으로 나눈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오봉산ㆍ상등봉ㆍ옥녀봉ㆍ비로봉ㆍ월출봉ㆍ차일봉 줄기를 경계선으로 해서 내륙을 향한 서쪽이 내금강, 동해 바다를 향한 동쪽이 외금강이다. 대체로 내금강은 상대적으로 완만하고 외금강은 경사가 가파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산 여행이라고 하면 주로 내금강 쪽을 보는 것을 말했지만, 남북분단 이후 금강산 관광 때는 전방 군사 지역이 많은 내금강은 북한에서 거의 공개하지 않았기에 주로 외금강 코스를 돌았다. 이 외에도 외금강의 남쪽 부분을 신금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금강산에 속하지는 않지만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위치한 여러 기암괴석군들을 해금강이라고 부른다. 계절별로 이름이 따로 있기로도 유명하다. 각 계절마다 금강산이 보여주는 풍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그리고 눈이 내렸을 땐 설봉산(雪峰山), 묏부리가 서릿발 같다고 상악산(霜嶽山),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등으로도 불린다. 가을 단풍의 풍악산이다

이처럼 금강산은 한민족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이름이 잘 알려져있으며, 수려하고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한 명승지로도 손꼽히기 때문에, 다른 명승지 중에서도 금강산의 이름을 따온 곳들이 많다. 경상북도 경주시의 소금강산(작은 금강산)이나 경상남도 거제시의 해금강(바다의 금강산), 전라남도 해남군의 금강산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산들은 고래로부터 '**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함경북도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칠보산, 황해도의 금강산이라고 불리었던 장수산[12], 평안북도 의주군의 금강산이라는 석승산(일명 석숭산, 금강산, 525m) 등이 있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은 대한민국 일부 산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민통선 이남에서 거리가 가깝지는 않을 뿐더러, 다른 금강산 봉우리들도 해발이 높기에 금강산 비로봉을 찾아서 볼 수 있는 날은 매우 운이 좋은 날이다.

참고로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화진포에 위치한 응봉에서는 금강산 비로봉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금강산은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기록이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으며, 한반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도 명성이 높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화랑들이 금강산을 유람했고 지금도 영랑봉 등 지명에 흔적이 남았다. 영험한 산이라는 믿음이 있어, 신라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 데도 불구하고 사찰 백수십여 곳이 창건되었다. 신라가 멸망할 때에도 신라의 마지막 태자이던 마의태자가 고려에 투항한 아버지 경순왕을 따라가지 않고 동생과 함께 금강산에 남아서 여생을 보내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2.역사적 배경

 

고려시대에도 금강산의 명성은 이어져서 11세기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소동파가 직접 하지는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 태종 4(1404) 921일자 1번째 기사에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하며, 고려에서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라는 말이 중국에 있을 정도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굳이 소동파가 언급한 게 아니더라도 금강산의 명성이 중국에서도 알려졌음은 분명하다.

대저 중국에서도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이디어는, 중국의 문화적 수세에 밀린 조선에서도 "금강산만큼은 우리가 중국에 비견될 수 있다"라는 문화적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궁가의 일개한퇴(별주부가 토끼를 유인하는 대목)에서, 토끼가 나열하는 유수의 명산 이름 중에 유일하게 한반도에 있는 산이 바로 금강산이다.

조선시대의 수많은 문인들도 금강산을 읊은 작품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 조성하(趙成夏)가 고종 2(1865) 43일간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는 금강산기(金剛山記)라는 책을 지어 자기 여정과 당시 금강산에 있던 고적들에 얽힌 이야기를 적었다. 이 책은 상당히 널리 퍼져서 1931년 경성 주재 영국인 외교관 아처(C.H.Archer)가 금강산 비로봉을 등산한 뒤 남긴 기록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인용했을 정도였다.

일찍이 금강산의 빼어난 경관은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도 명성이 잘 알려졌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이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자꾸 금강산 타령을 해서 귀찮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리학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백두산과 함께 금강산을 화려하게 그려놓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한반도 최초의 전기철도인 금강산선을 직접 부설하고, 일본 본토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서울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타고 금강산을 여행했을 정도로 금강산 관광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일본의 국민적 가인 와카야마 보쿠스이도 금강산을 여행한 뒤의 소감을 노래로 남겼는데, 금강산 내 장안사에서 '장안사 뜰의 작약 한창이구나 / 다가가보니 들리네 꽃향내가' 라는 단가를 읊는 등, 금강산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묘사했다.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로서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고 조선에 대해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도 초월한다"며 금강산을 극찬했으며,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왕세자 시절에 한국에 방문해 1926년에 금강산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활용했던 금강산 전철은 하필이면 노선 대다수가 민통선 및 비무장지대와 일치하는 바람에 지금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일부 구간은 금강산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데도 금강산 관광객의 출입관문격이었던 장전항은 관광도시가 되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여관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전항은 6.25 전쟁 이후 북한 치하에서 쇠퇴했다. 북한 치하에서 금강산은 여전히 휴양지로 이름이 높기는 하다. 문제는 북한에서 여유있게 관광을 할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북한은 여행의 자유가 없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금강산의 바로 밑에 남한령 강원도 고성군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3.총평

금강산은 아름다운 경치도 유명하지만 . 불교의 성지로서의 의미가 크다

기보살(法起菩薩), 또는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이 금강산에 거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인도의 보타락가산[보타산(普陀山)]에 관세음보살이 머물듯[20], 우리나라의 금강산에도 법기보살이 거한다고 여겼다. 아마도 원래부터 금강산을 영험한 산으로 여겼을 텐데, 불교가 전래된 뒤 금강산을 불교적 성지로 윤색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금강산의 '금강(金剛)'이라는 이름은 불교의 경전으로 유명한 화엄경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 라고 기록한 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위 설명에 덧대어 "풍악(楓嶽)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승려들이 화엄경에 근거하여 금강산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 이름이 고정된 것 같다" 라고 추측한다.

화엄경에는 바다 가운데 산이 있는데, 여기에 법기보살이 거한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을 금강산이라고 여긴 것이다. 현대의 지리관으로는 납득이 안 되지만, 과거에는 중국에서 신라를 갈 때[21] 배를 타고 당항포에 닿거나 청해진을 거쳐 울산광역시로 도착했기 때문에 중국 쪽에는 이런 인식이 붙었다. 심지어 이 시기 아랍 지도에는 신라가 섬으로 나온다 아무튼 이 내용을 근거로 금강산은 점점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금강산 봉우리가 12천이라고 말하는 것도, 법기보살의 권속 12천이 있어 저마다 봉우리 하나씩에 거한다고 여긴 데서 나왔다. 여러 봉우리들 중에서도 특히 담무갈봉은 그 자체로 법기보살이라고 여겨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22] 등 고려의 고승들이 예경을 올리기도 하였다.

중국에까지 금강산의 명성이 퍼진 데에도 이런 믿음이 영향을 끼쳤다. 승려나 불자들은 법기보살의 성지를 순례하고자 찾아왔고, 그래서 절도 많이 들어섰다.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있다는 믿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늦어도 12세기 말에는 분명히 있었다. 고려 신종 2(1199) 건립된 '발연사진표율사장골탑비'에 화엄경의 내용을 근거로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성지라고 썼기 때문이다. 충렬왕 33(1307)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에서 법기보살에게 예경하는 모습을 묘사한 불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금강산을 법기보살과 연결짓는 인식은 고려 초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불화는 후대의 금강산 - 법기보살 신앙을 고려 초까지 소급하여 그린 것이다.

원나라 황실도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거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어 금강산에 있는 사찰과 승려들에게 시주하고 예배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유점사에 있는 53불도 금강산이 불교적 성지가 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인도에서 문수보살이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여러 불상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 중 형상이 온전한 불상 53좌를 골라 큰 종()에 넣어 바다로 띄웠는데, 종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금강산 근처까지 도착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점사 자리에 절을 세워 불상을 안치했다는 것이다. 불이 나서 사찰이 소실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불상만큼은 따로 빼내어 보존될 수 있었다 한다.

이에 따라 "도사" 하면 "계룡산 도사"를 꼽듯이, 조선의 승려는 금강산에서 수련하는 것을 제일로 여겨 스스로를 '금강산인', '금강상승'이라고 칭했다 한다

금강산은 한민족의 신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산이자 명승이기 때문에,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는 말과 같이 사찰 또한 많이 자리했다. 다만 6.25 전쟁 도중에 금강산의 많은 상징적 산사가 소실되었다.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던 장안사, 석왕사, 유점사나 정양사, 마하연사, 장연사, 문수사, 발연사, 송림사, 도산사, 금장사, 삼장사, 건봉사 등 수 많은 암자와 사찰이 그렇게 사라졌다. 2022년 현재 북한 측이 관리하는 금강산 내 사찰들은 문화유적지로 건물만 복원해둔 것이거나, 남북 교류 차원에서 남측과 협력해 새로 지은 것들이다. 그 외 대형 사찰 외의 작은 암자들은 6.25 전쟁 때 소실되었거나 아예 철거된 것들이 많다.